나와 타인에 대하여
나는 최근에 연인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내가 없을 때부터 있던 모임이고, 나는 사실 그 사람들을 잘 모른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은 나의 연인 뿐.
내가 예상했던 분위기와 비슷했고 특별히 모나지 않게 행동하려 했다.
그럼에도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어디에서 기인한 불편함인가? 라는 물음을 내 자신에게 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말 한마디, 제스쳐 하나, 이런 것들이다.
대개는 친절했지만 그 안에서 하나씩 뾰족 튀어나오는 못 같은 것.
나는 나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어서인지,
연인과의 관계가 돈독하지 못해서인지,
작은 못들 몇 개가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겨우 그 몇 개에 살짝 긁혔다고 아파하고 힘들어 했다.
나는 그 책임이 연인에게 있다고 생각을 했다. 날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면서! 날 또 이런 대우를 받게 해! 하며.
혹시, 다른 사람이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이 사람은 원래 나보다는 타인의 편에 더 서주는 사람이지. 하며 생각의 꼬리가 참 길어졌다.
싫은 소리, 아쉬운 소리, 못 하는 사람이다. 맺고 끊음도 참 헐렁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러니 또 내 곁에 있겠다 결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라 여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특성은 언제나 장점이기만도 어렵고, 언제나 단점이기만도 어렵다는 것을 안다. 나의 특성도 그가 품어 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조금 더 여유롭게 여유롭게, 너그러워지고자 한다.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이 같지 않으니 내가 바랬던 것은 그저 내 바램일 뿐,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리라 믿는 것은 어린 아이같은 순진함이다. 그러니 나는 수용해야 한다. 다만 내가 결정해야 할 것은, 나의 수용이 나의 파괴로 이어지는 지이다. 또한 나의 수용이 나의 가치관과 얼마나 부합하느냐이다.
가치관이 맞지 않으면 관계가 어렵다는 말을 이제야 실감한다. 사람 관계라는 것이 참 간사한 것이, 99가 맞아도 1이 맞지 않으면 맞지 않는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그 1을 100분의 1로써 판단하고, 서로 가치관을 공유해 나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향해야 할 방향인 것 같다.
'나의 해방 일지'에서는 '추앙'을 사랑이라 한다. 추앙은 사람을 진정으로 강해지게 하고, 단단해지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받는 것 없더라도 그저 추앙을 해보고자 했는데, 난 참 아직도 모자라는 그릇이다. 나의 연인이 나의 추앙으로 하여금 단단하고, 때로는 굽어질줄 알며, 따뜻하고, 또 차가워 질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또한 성장하는 연인의 곁에서 나 역시 성장하고 성숙하며 주위를 돌아보는 여유가 있는 이가 되기를 소망한다.
다행이다. 이 글의 끝이 소망과 낙관으로 마무리 짓게 되는 걸로 보아, 나의 회로가 건강해지고 정상화 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