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어떻게 살 것인가-유시민

그라쎄 2017. 2. 12. 04:31

드디어, 한 권의 책을 다 읽었다.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은 요즘의 나에게 흔치 않는 일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다. 어떻게 살 것인가. 아마, 이왕이면 '잘' 살고 싶다는 욕심일 것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지에 대한 궁금함을 가졌기 때문이다. 나의 궁금함은, 늘 타인의 가치관을 엿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마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일 것이다.

이 책의 작가도 말하듯, 절대적인 기준이나 절대적인 가치 같은 것은 없고, 그것을 감히 그가 제시할 수도 없다고 한다. 동의한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하물며 인간의 존엄성까지도 나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어떤 하나의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가 말하는 것은, 그의 생각이고 가치관이며 신념같은 것이다. 나는 이 것을 그대로 따를 생각은 없다. 나는 나만의 가치관과 원칙을 정할 것이고, 이 가치관과 원칙이 선한 것이고 사랑에 바탕을 두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이 갖는 인생의 통찰(?)을 썼다. 기억에 남는 글귀 중 하나는, 삶에는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291)이다. 그러니까, 원인과 결과가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원인이나 결과 자체도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 (이런 뜻 아닐까?)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만약, A가 원인이고, B가 결과라고 할 때, A라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B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A를 하지 않았더라도 B는 일어났을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무엇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니, 감히 인생에서 인과 관계라는 말은 쓸 수 없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기에 자책할 것도, 으쓱할 것도 없다. 잘된 것은 잘된대로, 잘되지 않은 것은 잘되지 않은대로 그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지금 여기의 내가 사는 삶의 순간이 아닐까 싶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니, 이는 장자의 행복이다.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되니, 이는 나비의 불행이다."
고등학교 때인가, 교과서에서 호접몽, 몽중몽 뭐 이런 얘기를 하며 이런 짧은 우화(?)를 접한 적이 있다. 이 책에 장자라는 인물이 소개되어서 퍼뜩 떠올랐는데, 열 몇살, 해봐야 열 여덟 쯤, 이 우화를 접했을 때는 그러니까, 현실이 꿈인지 꿈이 현실인지 모른다는 얘기구나. 현실이 덧없다는 얘기인가? 하며 정확한 해석이 궁금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쳤던 기억이 난다. 한 십년 쯔음 지나고 다시 떠올라 생각해본다. 장자가 나비이거나, 나비가 장자이거나 인 것이 중요한 걸까? 장자이고 나비인 것을 구분하는 것은 그 것을 바라보는 이이고 (다시 말해 제 3자, 장자나 나비와는 별 관계없는) 정작 행복하고 불행하는 이는 장자건 나비건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은유와 우화로 가득 차 있다는 장자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이것만으로 꽤 괜찮은 소득 아닌가? 인간은 홀로서기를 해야하지만, 홀로 살 수는 없다. 타인의 인생관을 합법적(?) 염탐하는 것은 나의 인생관에 늘, 물음표를 던져준다. 2017년 2월 11일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