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였나, 한창 논술 및 토론이 대유행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학교에서는 토론 동아리를 만들었다. 당연히 나는 그 동아리에 들어갔고.
나는 말을 잘한다. 논리정연하게, 주제 의식 명료하게 말하는 지는 잘 몰라도, 그 나이 때 흔한 사춘기 소녀답지 않게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말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 선생님께서는 첫 타자로 나를 지목하곤 했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서론을 쓰는 건, 그 때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All-round player라는 것을.
토론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찬성/반대로 나뉘어 입장마다의 장단을 논한다. 그러다 보면 한 쪽은 좀 부족할 때도 있고, 한 쪽이 너무 우세해질 때도 있다. 서로의 입장을 공격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 때 선생님께서는, 찬성이었던 사람을 반대 편으로 가서 이야기를 해보라, 반대였던 사람을 찬성 편으로 가서 이야기를 해보라. 하셨다. 이런이런 장점이 있고, 이것은 윤리적으로 이렇고, 하며 잔뜩 이야기했던 것을 반대편에 서서 그 허점이나 놓쳤던 부분을 말해야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내가 이건 정말 맞는 말이야! 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했던 것이 반대편에서 생각해 보면 또 그렇게 맞는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해지면서, 결국은 아, 그러니까 답이 없구나? 하고 밍숭맹숭하게 끝나는 것이다. 나름의 정리를 하곤 했지만 기분이 요상하게 멜랑꼴리해졌다.
나는 토론을 준비할 때 항상 양측의 입장을 준비해 가곤 했다. 그리고 부족한 수의 편에 서곤 했다. 중2감성을 가진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진 않으나, 이러한 이유로 나는 All-round player라는 칭찬을 듣곤 했다. (이런 칭찬이 고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칭찬이 고플 때니)
이 All-round player라는 말이 왜 갑자기, 서른이 다 되어서 생각이 났느냐 하면 말이다. 이 중딩감성과는 다르게, 칭찬을 받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내가 좀더 마음 평온하게 살기 위한 목적으로 여기저기서 잘 뛰려고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잘 하려는 게 아니라, 남을 좀더 잘 이해해야 나도 날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그래야 난 나를 더 잘 설명하고 표현할 수 있구나. 그리고 하루하루 사는 게, 그저 살아내는 게 아니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입장을 한껏 받아들일 수 있게 말랑하고 촉촉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구나. 뭐...이런 시덥잖은 생각이 들었다. 날아오는 공을 보며 칠 생각만 하지 말고, 이 공을 던지는 저 사람의 입장도, 나의 공에 달릴 준비를 하는 또 저 사람의 입장도, 또.. 멀리서 날카롭게 다음을 계획하는 저 사람도, 그 들이 어떤 마음으로 지금에 있는지. 한번쯤은 들여다 볼 생각이라도 하면서 살아야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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