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다. 72

어느날 갑자기

어느 날 갑자기 내린 소나기가 아니라 저 멀리에서부터 오고 있던 구름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저 먼 하늘에서부터 오고 있던 바람이다. 어느 날 갑자기 무심하게 핀 꽃이 아니라 가느다란 바람에 의지해 간신히 닿은 꽃이다. 그러니, 갑자기 들이 닥친 우연이 아니라, 애써서 애써서 덩그러니이다. 그러니 부디 고생했다 다독여다오.

기록하다. 2020.03.23

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시즌2

도발적인 제목이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아니고, 심지어 사랑했던. 더 심지어 남자들? 시즌1은, 전형적인 하이틴 로코물이였다. 그 때는 순수한 라라진이 사랑스러웠고, 그런 라라진을 다시 만나고 싶어 시즌2를 봤는데. 시즌 1보다는 사건의 갈등이 크지 않다. 하지만 그냥 하나 씩 툭툭 던지는 메시지가 있었다. 어차피 결말은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지금 내 마음을 모르는 척 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조금이나마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음. 사랑에는 당연하게도 여러 모양과 색깔이 있다는 것. 내 사랑은, 내 마음과 같을 리가 너무 당연히 없는데도, 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모두 제각각의 방법으로 또 마음으로 사랑을 한다. 하고 있다. ..

기록하다. 2020.02.29

All-round player

중학생 때였나, 한창 논술 및 토론이 대유행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학교에서는 토론 동아리를 만들었다. 당연히 나는 그 동아리에 들어갔고. 나는 말을 잘한다. 논리정연하게, 주제 의식 명료하게 말하는 지는 잘 몰라도, 그 나이 때 흔한 사춘기 소녀답지 않게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말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 선생님께서는 첫 타자로 나를 지목하곤 했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서론을 쓰는 건, 그 때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All-round player라는 것을. 토론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찬성/반대로 나뉘어 입장마다의 장단을 논한다. 그러다 보면 한 쪽은 좀 부족할 때도 있고, 한 쪽이 너무 우세해질 때도 있다. 서로의 입장을 공격하지 않고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것이 목적이긴..

기록하다. 2020.02.15

잠잠-탕투타

잠잠 둥근 보름달이 어두운 도화지 속 가장 밝게 빛남에도 더 밝은 빛 아래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아. 더 밝은 빛을 거두고 도로를 나서는 순간은 외롭고 힘들고 지치겠지만 쓰러지지마라. 힘내라. 보이지 않는 빛이 널 지켜줄테고 숨어있는 빛이 곧 널 반겨줄테다. 나는 다만, 지금 어두운 도로 위일 뿐. 아직, 이 곳에서 볼 수 없을 뿐, 나를 향한 위로가 그득이다. 더할 나위없이 충만하다.

기록하다. 2020.02.12

시를 필사한다

만년필로 시를 필사한다. 만년필 특유의 슥삭하는 소리가 좋다. 미움 원망 후회 가득한 내 마음 방이 잠시나마 정갈하게 청소된다. 다시 들어차더라도, 잠시라도 비워내어 좋은 감정을 채울 수 있다. 이렇게 마앍게 살고 싶었는데 하며 나를 위로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시를 필사한다. 요즘 나에게 들어차 있는 생각이 한가지 있다. 힘들다는 게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인데,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하는 결정들이 나를 외롭고, 실패자로 만든 것 같다. 힘들어도 버텨본 것들이 없다면 나는 정말이지, 아주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 음. 그래서. 강물에게 빨리 가라고 등 떠밀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이번 강은 이런 빠르기구나 하면서, 지금 순간 순간을 느끼고 온전히 기억하면서 자박자박 걸어야겠다고 다짐해봤다. 그리..

기록하다. 2020.02.10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이기는 게 중요하다. 남보다 더 낫고 싶어 노력한다. 남들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한다. 그러다가 한번 지면, 다음번에는 이길 거야 하며 노력한다. 나는 이러한 나의 성격이 꽤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된거지 하고. 나는 50가지의 장점이 있고 또, 그 이면에는 50가지의 단점이 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그저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인데. 어느 상황에서 누군가는 돋보여 보이고 또 다른 상황에서는 다른 누군가가 돋보인다. 그래서, 내가 나아보이지 않는 날에는 그냥 그 날이 그런 날인 거고, 내가 좀 더 나아 보이는 날은 그냥 그 날이 우연히 그런 날인 거라고. 어쩌면 내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건 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뿐이라고, 조금 편히 살아도 되..

기록하다. 2020.02.02

노빠꾸

노빠꾸. 직진. 내가 밉기도 하고, 어리석은 내 모습에, 경솔한 나에게 싫증이 나기도 하지만. 나는 나의 최선을 했다. 내가 덜 아프고, 또 나로 인해 상처 받지 않기를 원했다. 지금 내가 아쉬운 건 좀더 참을 수 있게 내가 좀만 더 단단했으면 좋았을텐데. 딱 여기까지. 그 외의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그러니까, 나는 앞을 봐야겠다. 앞통수에 눈이 달려있는 그 이유에 수긍하며 걸어야겠다. 빠꾸는 없다. 나는 나의 일을 한다. 그러다 보니까 일에 대한 열정이 다시 보글보글 일어나고 다시 좀 내가 이해가 된다. 1월이다. 끝은 시작이고 우리는 항상 연속의 연속을 살고 있다. 그러니까, 노빠꾸다.

기록하다. 2020.01.16

잠 못드는 밤

정말이지 오랜만에, 잠 못드는 밤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커피를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는데, 쉬이 잠들지 못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밤 나는, 요즈음 생각할 시간이 많다. 라고 말하는 것도 거짓이다. 나는 외면했고, 모르는 척 했고, 회피했고 그래서 도피했다. 그런 나를 직면했다. 그러고 나니, 내 마음의 지진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나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탓했었다. 그래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밉고 원망스러운 대상은 나였고, 나이다. 그걸 문득 깨달아버린 나는, 그 누구의 위로도 스며들지 못하고 그저 내 안의 동굴에서 그저 숨어있다. 아, 이제 어떡하지. 열심히 일해본다며 그동안 외면해온 나는 생경하고 당황스럽다. 내가 하고싶은 것을 하면서 살거야, 하면서 달린 나의 모습..

기록하다. 2020.01.04

첫, 눈

비몽사몽 출근해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다가 문득, 아아... 눈이 오네? 깨달았다. 산 위에 있는 학교라, 춥기도 춥고 출근하는 데 불편하기도 하지만, 멍하니 바라보는 창 밖이 그대로 하나의 그림이다. 특히나, 이렇게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는 날에는 더욱 더 그렇다. 벚꽃이 흐드러지는 날, 싱그러운 초록 잎이 초록초록하는 날, 하늘이 유난히 파란 날, 낙엽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날 그리고 눈이 소복 내리는 날. 이런 날은 잠시 일을 멈추고 밖을 내다보는 것만으로 충만해진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연약한 인간 주제에, 감탄말고는 할 것이 무엇 있겠나 싶다. 그래서, 내 욕심은 조금만 더 비우고 조금만 다독이면서 살아야지 했다. 그냥, 야금야금 걷다 보면 그 길 위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웃으면 되겠지. 걷다가 ..

기록하다. 2019.12.03